TV회고록 울림에서 신동식 회장이 출연하였습니다. 신동식 회장은 우리나라 조선산업을 이끌어 온 사람이며 현재 한국해사기술 회장으로 역임하고 있습니다. 신동식 회장은 20살에는 선박과 조선소 설계분야에서 최대규모인 토빈 컨설팅 회사의 설계 기사로 영국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신동식 회장은 이 회사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 조선인들의 꿈의 자리인 로이드 선급 협회의 국제 선박 검사관이 되었습니다. 당시 대우는 유학생들의 한달 생활비가 20파운드 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200파운드가 넘는 월급을 받을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고 하네요. 또한 본인을 대하는 자세가 존경심이 가득해서 굉장한 자긍심을 느끼가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신동식 회장은 한국 전쟁 당시에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입학을 하였습니다. 전쟁중이어도 신입생은 뽑았던 모양입니다. 신동식 회장이 조선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산 앞바다에 있는 미국 영국 수송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입학한 서울대학교를 태릉에서 졸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소가 없어서 졸업은 해도 취업할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시 숙명여고에서 영어와 수학을 갈켰다고 하네요.
그래서 선택한 곳이 스웨덴의 코큠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일하고 싶다고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왔다고 합니다. 비행경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를 대주었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전쟁으로 인하여 꽤나 알려진 국가라서 어렵지 않았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몇개국이나 걸쳐서 1주일만에 스웨덴에 가게되었습니다.
조선소에 취업을해서 낮에는 철판 자르고 용접하고 기능실습하고 밤에는 설계도 보고 주말엔 대학교수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영국으로 가서 1958년 스물여섯살에 영국 로이드 선급협회의 국제검사관이 되었습니다. 로이드 검사관이 승인하지 않은 배는 만들지도 못하고 운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로이드 선급회사의 영향은 대단하죠.
로이드 검사관이 될 수 있었던것은 다분히 운이 좋았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선박건조의 패러다임이 바뀔때 검사관이 많이 필요해서 그때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로이드 검사관이 많지만 당시에는 아시아에서 본인 한명 뿐이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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